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장계전쟁 (문단 편집) === 광서파의 몰락 === 4월 4일 우한이 항복하여 5천명의 수비대가 장제스에게 투항했다. 4월 5일, 장제스는 우한에 입성하여 병사들의 사열을 받았으며 우한 탈환기념 우표를 발행한 후 4월 15일에 [[루디핑]]을 우한 위수사령에 임명했고 유문도를 우한 시장에 임명했으며 4월 16일 장사를 함락시켰다. 장제스는 [[장쉐량]]의 동북군벌에게도 참전을 요구했지만 장쉐량은 보경안민을 구실로 이를 거절했다. 어쨌거나 봉천군벌의 참여 여부와 상관 없이 광서파의 열세는 확연하였고 궁지에 몰린 바이충시는 이후 톈진을 거쳐 홍콩으로 달아났고 장제스는 [[탕성즈]]에게 바이충시 휘하의 상군을 수습할 것을 지시하여 바이충시의 부대들은 탕성즈에게 투항했다. 하위 등도 출국을 통전하고 달아났으며 잔존 부대는 정부군에 항복했다. 리쭝런은 광동을 거쳐 광서로 돌아와 저항했고 여기에 광서성 정부 주속 황샤오훙과 돌아온 바이충시가 합세했다. 5월에 접어들어 장제스는 호남, 광동, 운남 3개 방면으로 광서에 대한 총공세를 감행했다. 이에 바이충시는 5월 5일 호당구국군을 선포하고 장제스에 대항했다. 한편 서산회의파는 광서파에 대한 무력토벌을 감행했으나 장제스가 이를 묵살하자 광서파와 연대하기로 결정했고 5월 중순, [[쉬충즈]], [[쥐정]], [[셰츠]] 등 서산회의파들이 광저우에 집결하여 광서파와 회담했다. 서산파는 광서파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왕징웨이]]의 개조파와 연대하는 것에 대해 반대를 분명히 했고 5월 18일 서산파와 광서파가 연대하여 장제스의 국민정부 주석 취임 반대, 3전대회의 정당성 불인정, 국민회의 소집, 쉬충즈의 도장총사령관 추대 등에 합의함으로 양광의 군사력은 쉬충즈에게, 정치는 쥐정과 셰츠에게 위임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장제스는 격노하여 혁명원로에 대한 예우를 걷어치우고 [[쩌우루]], [[쥐정]], [[셰츠]] 등을 체포하여 즉시 총살하라고 지령했다. 그러나 광서군 내부에서 허젠 등이 장제스에게 포섭되어 반란이 일어나는 한편, 정부군과의 교전에서 광서군이 참패함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해군과 공군을 동원하여 5월 10일 광서의 성도 구이린을 점령했고 오주, 난닝을 잇달아 수복함으로 6월에 광서 전역을 함락시켰다. 황샤오훙, 바이충시가 하야를 통전했고 리쭝런은 [[영국령 홍콩]]으로 도주하였으며 6월 27일 장제스에게 항복한 이명서가 난닝에 입성하면서 [[월계전쟁]]이라 부르는 광서 전역도 종결되었다. 서산파는 안전을 위해 평진 지역으로 이동하는 한편 펑위샹 등 다른 군벌들과의 합작을 모색했다. 장제스는 유작백을 광서성 주석으로 임명하고 [[천지탕]], [[천밍수]]에게 광동의 리지선 세력을 제거하게 지시함으로 리지선의 군정 대권을 박탈했으며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전투기를, 일본에서 야전포를, 영국에서 6만 자루의 보병총 구입을 지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